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겔 데 세르반테스 (문단 편집) == 생애 ==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1547년]] [[9월 29일]]에 태어났다고 알려졌으나 이 날짜는 고향 마을 [[성당]]에서 보관하던 [[세례성사]] 기록부[* 이사 등으로 여러 성당을 옮겨 다니더라도, [[교적]]은 옮겨지지만 세례 기록은 세례성사를 받았던 성당에 보존되어 있다.]에 적혀 있던 날짜에서 [[가톨릭]] 관습상 태어나서 [[세례성사|유아 세례]]를 받는 기간을 역산해서 계산한 것이라,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드리드]] 북쪽에 자리잡은 [[카스티야]] 지방의 작은 도시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에서[* 알칼라 데 에나레스가 아니라 다른 소도시인 알카사르 데 산후안(Alcázar de San Juan) 출생이란 설도 있다. 일단 세르반테스 가문은 원래 지명 그대로 [[구호기사단]] 영지였던 알카사르 데 산후안에서 온 가문은 맞고, 현지인들은 알칼라 데 에나레스 출생으로 등록된 건 당시 서류 미비, 행정 오류, 뒤늦은 [[출생신고]] 때문이라고 굳게 주장하고 있다. 하술된 대로 어린 시절에도 집안 경제적 사정 때문에 한 곳에 쭉 붙어 있지 않고 계속 돌아다녔고 세르반테스 본인도 카스티야란 큰 지역적 정체성은 강하게 의식했지만 카스티야 안의 특정 동네에는 큰 애착을 보이지 않았던 반면, 안 그래도 산업도 딱히 없고 인구도 폭락한 [[카스티야라만차]] 지방에서 세르반테스 관련 관광 수익은 막대하기 때문에 스페인 현지 지자체들 사이에서 세르반테스 관련 연고지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몰락한 이달고[* 스페인의 하급 [[귀족]]. 당시 시대상을 비추어 보면 귀족은 땅 파 먹고 일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책무와 시선은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막상 진짜 평생 일 안 하고 일가족이 먹고살 만한 대귀족들의 재산은 없는 가장 고달픈 경우였기 때문에, 그나마 사회적 위신과 경제난 둘 다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 [[군대]], [[성직자|성직]], [[공무원]] 업종에 집중적으로 뛰어들며 스페인 제국의 행정 관료, 식자층, 장교단 중추를 형성했다.] 집안을 뿌리로 둔 [[이발사]] 겸 외과 [[의사]]인 로드리고 세르반테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7남매 중 넷째로 출생.] 할아버지는 종교재판소 [[변호사]]였다. 오늘날 변호사, 의사 집안이라고 하면 대단하다 생각하겠지만, 이 시대 문맥에서 변호사, 원래 말로 licenciado라 하는 사람들 역할은 [[공증]]인에 더 가까웠고, 사실 현대에도 변호사 사회 잘 보면 그렇듯이 왕실 직속 관료 기관에서 일하는 관료 정도라면 몰라도 많은 경우 실제 하는 일은 동네 관공서 [[서기]] 정도 지위로 딱히 크게 부유하지도 못했다. 그나마 세르반테스 할아버지 후안 데 세르반테스는 교육도 [[살라망카 대학]] 법대 제대로 나왔고, 여기저기 [[중소도시]] 시장직도 겸임하며 대귀족 집안 변호사로도 일해보는 등 상당히 성공한 공무원의 삶을 살았던 모양인데, 막상 출세하면서 마누라하고 애들, 즉 세르반테스의 아버지인 로드리고와 삼촌 안드레스는 내팽개쳐두고 자기는 마음대로 고향인 [[코르도바(스페인)|코르도바]]로 돌아가버려 세르반테스의 집안은 부자 할아버지를 두고도 가난했다. 의사도 피를 뽑거나 땀을 흘리게 해서 환자를 고치는 수준이었다. 그런 일은 이발사도 했다. 당시 스페인은 순수 [[기독교]] 집안 혈통을 중시했다. 따라서 의사나 변호사, 세금 징수원 같은 일은 주로 콘베르소, 즉 [[유대인|유대계]] 개종자들이 했던지라 보수도 안 좋고 사회적으로 멸시까지 받았다. 게다가 아버지 로드리고는 어린 시절부터 [[청각]]에 문제가 있었던 데다, 경제적으로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가족들이 스페인 여러 곳을 떠돌았다. 빚 때문에 옥살이도 했다. 세르반테스의 유년 시절은 가난과 비참함과 부끄러움으로 얼룩졌다. 세르반테스의 학력은 불분명하나 대학은 밟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1568년 당대 최고 지식인 후안 로페스 데 오요스가 낸 [[수필]]집에 그의 [[시]] 4편이 실린 적이 있다. 돈키호테 전편 제9장에 나오는데,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종이라도 주워 읽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554년 빚 때문에 전 재산을 차압당하여 가족들은 13년 동안 스페인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는 것이 없지만, 마드리드로 집안이 이사한 1560년대부터 저명한 [[인문학]]자인 로페스 데 오요스(López de Hoyos) 아래에서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후 1569년이 되자 [[교황청]]에 특사로 파견된 스페인 [[추기경]]의 종자로 선발되어 [[로마]] 물을 좀 먹고, 이후 스페인 왕 [[펠리페 2세]]가 [[동군연합]]으로 있던 [[나폴리 왕국]]으로 가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무적함대|스페인 해군]]에 지원하게 된다. 당시 세르반테스가 왜 난데없는 군 입대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9월에는 "왕이 머무는 궁정이나 성채 등에서 싸우면서 무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라는 법을 위반해, 오른손이 잘리고 10년 간 마드리드에서 추방당하는 벌에 처해지자 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탈리아 반도]]로 도망갔다. 로마에서 먼 친척뻘 되는 고위급 [[사제]]의 도움을 받고, 훗날 [[추기경]]이 되는 다른 사제의 수행원으로도 일하면서 [[르네상스]] 문학을 섭렵했다. 그러다 1571년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의 해군에 맞서 결성한 전투함대 휘하 부대에 자원 입대한다. 스페인과 교황청,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 [[제노바 공화국|제노바]]가 중심이 된 [[신성 동맹]]의 연합함대와 오스만 제국 함대가 맞붙은 [[레판토 해전]]이 벌어질 즈음에 재수없게 열병에 걸렸다. 레판토 해협에서 대승했지만, 이때 [[총상]]을 입고 왼손이 불구가 되어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그때가 24세였다. 군 생활을 계속하다가 1575년 9월에 귀국하는데 탄 배가 태풍에 휩쓸리고 튀르크 해적의 습격까지 받아 포로가 된다. [[노예]] 신분으로 5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가족이 모은 돈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풀려났다. 그때가 33세였다. 그때 [[자유]]의 중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돈키호테의 주제 중 하나가 자유다.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구속할 수 있나 묻는다. 집에 돌아왔지만 가세는 더 기울어 있었다. 1569년 첫 번째 소설 ‘라 갈라테아’를 출간했지만, 생계를 위해 [[포르투갈]]로 가서 왕실 업무를 봤다. 당시 꿈의 대륙인 중남미 파견을 청원했지만 불발에 그쳤다. 아마 집안이 개종 유대인이라서 그랬을 걸로 추측한다. 그 후 [[막시밀리안 2세]]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황제]]가 써준 표창장을 받고 제대하면서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오던 길에 악명 높은 [[바르바리 해적|알제 해적]]들에게 형 로드리고와 함께 포로로 잡히고 그 후 5년 동안 [[알제리]]에서 갇혀 지내게 되었다. 이때 마드리드에 있는 트리니타리아스 [[수녀원]]에서 그를 위해 해적들에게 몸값을 지불해줬다. 이 과정이 상당히 드라마틱한데, 세르반테스를 데리고 있던 쪽이 원래 [[수녀원]]에 요구한 금액보다 더 높은 금액을 부르자 [[수녀원]]은 세르반테스 가족에게 받은 돈 외에 부랴부랴 주변 상인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간신히 돈을 마련할 수 있었고, 세르반테스가 [[이스탄불|코스탄티니예]]로 가는 배에 강제로 태워져 막 출발하려고 하기 전 협상이 타결되었다. 세르반테스는 풀려난 뒤 [[병영식|군사 식량]]을 납입하는 식량 조달원으로 [[안달루시아]]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직책을 맡았으나, 그런 중에도 교회 소유 [[밀]]을 징발했다고 파문당하고, 당국 허락 없이 밀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풀려난 뒤로 [[그라나다(스페인)|그라나다]]에서 세금 징수원을 했는데, 책임자의 [[먹튀]]와 기타 억울한 과정으로 인해 다시 [[세비야]] 감옥에 7개월 동안 갇힌다.[* 돈키호테에서도 세르반테스의 노예 생활이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된다. 돈키호테 일행과 만난 [[참전용사]]가 '''사아베드라'''라는 전쟁 포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인물은 명백히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다.] 갇혀 있던 동안에 그는 [[돈키호테]]를 구상했다. 그리고 풀려난 뒤 [[바야돌리드]]에 가정을 꾸렸고 거기에서 돈키호테 1권을 탈고하며 1605년 돈키호테 1권이 출판된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 되었고 문학사를 대표하는 걸작의 반열에 오른다.''' 이때의 나이가 58세. 라 갈라테아 이후 무려 20년 만에 내놓은 소설이다. 돈키호테는 당대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어마어마한 인기로 끌었고 1614년에 다른 작가가 무단으로 돈키호테 속편을 출간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런 광경을 본 세르반테스는 1615년 정식 돈키호테 속편을 낸다. 그 뒤 마드리드로 거주지를 옮기고 1616년 4월 22일 [[당뇨병]]과[* 말년에 가면 갈증을 심하게 시달렸다.] [[간경변]]으로 한편의 영화같은 생을 마감한다. 향년 68세. 숨질 때까지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의 일을 도왔다고 한다. 결국 사후에 그 수녀원에 묻혔다. 이때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에 묻혔으나, [[수녀]]들 및 수녀원 관계자들만이 참석한 채 장례 [[미사]]가 치러졌고, 그 후 4세기가 지나 누구도 그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약 400년 만인 2014년, 스페인 정부에서 10만 유로(약 1억 4천만 원)가까이를 들여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 내의 세르반테스의 유해를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1&aid=0007470794&date=20150317&type=0&rankingSeq=1&rankingSectionId=103|찾았다]]. 이 수녀원 지하에는 세르반테스와 그의 부인 등이 묻혀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생전에 이 수녀원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발굴 팀은 유골의 손상이 심해 세르반테스의 유골을 다른 것과 분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세르반테스의 묘지는 그의 사망 이후 수녀원이 확장되고 여러 차례 재건축되면서 400년 동안 잊혔다. 발굴 팀은 작가 사망 기록에 따라 2014년 4월부터 이 수녀원에서 세르반테스의 유골을 찾아왔다. 발굴 팀은 앞서 2014년 1월에는 수녀원 지하에서 'MC'라고 적힌 나무 관 일부를 발견했다. 'MC'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첫 글자들이다. 이후 수녀원 지하에서 일그러진 왼팔 뼈과 총알에 손상된 가슴뼈, 치아 등을 수습했다. 위에 서술한 대로 군인으로도 활동한 세르반테스는 1571년 스페인이 이끄는 연합 함대와 오스만 제국 함대가 맞붙은 레판토 해전에서 3발의 총탄을 맞아 왼팔을 못 쓰게 되었기에 정확히 그라는 증거가 된 셈. 하지만 [[DNA 검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세르반테스의 유해라고 확신하느냐는 반론이 있어서 새 무덤을 만드는 것은 흐지부지된 듯하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drid-Miguel_de_Cervantes_monument.jpg|width=100%]]}}} || ||<:> {{{#EFD88F '''마드리드 에스파냐 광장 세르반테스 기념 동상'''}}} ||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단테 알리기에리|단테]] 이후 서양의 중심 작가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였으며 그 이후에 나온 [[톨스토이]]나 [[괴테]], [[디킨스]], [[마르셀 프루스트|프루스트]], [[조이스]]도 그에 못 미친다"라고 평했다.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03/dec/13/classics.miguelcervantes|#]] 현대 스페인에선 당연히 자국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추앙하고 있다. [[마드리드]]의 중심부인 에스파냐 광장에는 그와 돈키호테, 산초의 동상이 있으며 스페인 심장부에 동상이 있다는 의미로 국가의 [[아이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